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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함흥전투(이성계)-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 내용 정리 ]

 

14세기 고려는 전란의 시기였습니다.

주변의 모든 국가와 종족들이 한 번씩은 고려를 침공했을 정도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사납고 위험한 군대는 북방의 몽골과 남쪽의 왜구였습니다.

몽골과 왜구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군대였기 때문에 고려는 이런 군대들과 동시에 

싸워야 하는 전술적 난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군대의 이원화는커녕 한쪽도 제대로 대응할 군대조차 부족했습니다.

이런 고려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군대가 있었으니 바로 동북면의 군벌 이자춘과 

그 휘하의 토착병 군대였습니다.

이씨 집안은 몽골이 침공해 왔을 때 몽골에 항복해서 관직을 받고 이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이곳이 바로 쌍성 총관부입니다.

그러다가 원나라가 패망하고 공민왕은 쌍성 총관부를 수복하기 위해 작전을 펼쳤고

이 씨 집안은 저항 없이 고려로 귀순했습니다.

군대가 고갈된 고려로써는 이들을 배척하기보다는 이들로 하여 과거의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것이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이 무렵 원나라는 명나라에 패해 몽골 초원으로 돌아갔지만 만주지역은 여전히 몽골의 장군인 

나하추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중원에 터전을 잡으면서 야성을 잃고 약해졌던 몽골족과는 다르게 

만주의 몽골 기병은 여전히 강했습니다.

이런 원. 명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만주의 패자가 되기를 원했던 나하추는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의 군현을 습격함으로써 명의 동진을 저지시킵니다.

그리고 간도 진출의 교두보가 될 쌍성 총관부로 침략 해 갑니다.

 

20대 이성계, 역사에 첫 등장하다

1362년 나하추의 대군이 동북면으로 들이닥칩니다.

고려로써는 이자춘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이자춘이 갑자기 사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동북군의 지휘권은 당시 겨우 20대에 전투 경험도 거의 없었던

그의 아들 이성계에게 인계됩니다.

나하추의 군대는 몽골군의 후예답게 이성계가 근거지인 함흥을 떠나 북상하기도 전에

함흥 북쪽의 흥원까지 왔는데 이는 쌍성 총관부의 90퍼센트를 석권하고 최남단의 

수도만 겨우 남겨둔 셈이었습니다.

전력의 차이가 클 때 강한 적을 맞아 대항하는 좋은 방법이 농성이지만 이성계는 

농성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나하추가 침공한 시기가 음력 7월의 습하고 무더위가 한창인 때였기 때문입니다.

말과 사람이 금방 지치고 전염병이 발병할 위험도 큰 시기였지만 나하추가 이 시기를 

선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달만 지나면 음력 8월인 추수철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달만 지나면 점령지에서 군량을 확보할 수 있고 만약 공격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적국의 농사를 완전히 망치거나 막대한 군량을 약탈해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적국에게는 치명타가 될 것이고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이 기아에 허덕이게 

될 것이고 이는 절반 이상의 군대가 와해될 것이기에 2차 침공 시 쉽게 이길 수 있다는 

나하추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었던 겁니다.

때문에 이성계는 동북면을 지키기 위해서 최대한 빨리 승부를 보아야 했습니다.

나하추는 북쪽 흥원에 그리고 이성계는 함흥에 있었습니다.

두 군대 사이에는 함관령과 차유령이라는 두 개의 고개가 있었는데

함관령이 함흥으로 들어오기에 더 가깝고 좋은 통로였습니다.

차유령은 멀리 돌아가야 하고 더 높고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산길 구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나하추는 먼저 나연티무르라는 만호에게 천 명의 병사를 주고 그를 선발대로 보냈습니다.

정예 기병 천 명은 일반 보명 만 명에 맞먹는 아주 강력한 군대입니다.

이로서 나하추는 고려군의 힘을 시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연티무르는 주저 없이 진군하여 함관령을 확보했지만 고려군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함흥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막아야 하는 함관령을 포기한 고려군에 자신감을 얻은 

나연티무르는 함관령에 500명의 군사를 두고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고개를 넘어 덕산 벌판까지 

진출합니다. 

얼핏 병력이 부족할 수도 있으나 몽골군을 따라잡을 군대는 세상 어디에도 없기에 나연티무르는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정찰과 전술기동을 하는데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덕산 벌판에도 고려군이 보이지 않자 안심한 나연티무르는 덕산 벌판에서 야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고려군이 야습을 해 왔고 몽골군은 피해를 입고 달아나게 됩니다.

하지만 오전에 넘어온 함관령이 길을 막았습니다.

이것이 이성계가 파 놓은 함정이었습니다.

우리 땅은 좁고 가파른 고갯길이어서 기병의 질주가 불가능한 방면

고려군은 기병도 강했지만 산비탈에서도 능숙하게 말을 탔습니다.

그리고 초행 길인 몽골군이 야밤에 길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나연티무르의 선발대는 전멸하게 되고 이에 화가 난 나하추는 전 군을 동원해 

함관령을 넘게 됩니다.

이성계는 또다시 덕산 벌판에서 나하추의 군대를 야습해서 피해를 입히지만

대군인 데다가 전쟁의 경험도 많은 나하추의 군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리와 지형에 

적응해가며 더욱 강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양 군은 결국 함흥평야에서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함흥평야에서의 결전은 나하추의 승리로 돌아가고 이성계는 도주하게 됩니다.

나하추는 곧바로 도주하는 이성계를 추격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성계에게는 숨겨놓은 최후의 한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끝까지 전체 병력의 규모를 숨긴 것입니다.

이성계는 나하추와의 결전을 앞두고도 대담하게 병력을 삼등분해서 나누었고

각기 다른 길로 한 지점에 모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부대를 이끌고 나하추를 약속 지점까지 유인한 것입니다.

추격하던 나하추는 삼면에서 협공을 받고 대패하여 소수의 병력만을 거느리고 

도주하게 됩니다.

나중에 나하추는 고려와 화친을 맺고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되며 이성계를 용병의 신이라고 극찬했다고 합니다.

 

 

[ 소감 ]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저자가 바로 임용한 박사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국방 TV의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처음 보면서 팬이 되었고 

이후에 임용한 박사님 관련된 콘텐츠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YTN에서 뉴스 멘터리 전쟁과 사람이란 코너로 예전 토크멘터리 전쟁사와 

비슷한 콘텐츠가 방영되게 되어 아쉬웠던 마음을 조금 달랬습니다.

 

이성계의 함흥전투를 보면 지형의 유리함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원리를 알고 원칙을 가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론이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것이 현장에서 사용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론만 가지고는 현장에서 제대로 사용되기는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현실에서는 응용력이 필요하고 임기응변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개인의 경험만을 가지고는 큰 전장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현실에서 어떤 일을 할 때든 이론과 경험은 부딪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무 경험 없는 이론은 늘 현장에서 의도와 다른 결과를 가져오고 

경험만으로 일을 하면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에서 이미 사용했던 과거의 경험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 현실에서 통하는 실전 감각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론과 경험은 각기 대립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지금 필요한 현실적인 전술을 만들기 위한 재료입니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것을 서로 융합하고 가공해서 현실에 맞게 만들어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변화합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을 넘어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현장에 맞게 어떻게 응용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발전시켜나가면서 실전 감각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