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9 년 1월 로드 챔스포드 준장이 지휘하는 약 3 천명의 영국군은 줄루왕국를 점령하기 위해
수도 울룬디로 나아가고 있었다.
줄루왕국은 지금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위치하며 북쪽의 보츠와나와 짐바브웨 일부까지 포함
하는 거대한 왕국이었다.
영국군이 줄루왕국을 욕심 낸 이유는 1866 년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다이아몬드와 황금광맥 때문이었다.
21세기까지 전 세계 생산량의 90 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이 광대한 지역을 겨우 3 천명의 병력으로 정복한다는 게 지금의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초기의 식민지 전쟁은 거의 그런 식이었다.
1월 20일 영국군은 이산들와나라고 불리는 특이한 바위산, 거의 수직으로 솟았지만 위는 평평한
산 아래 진지를 쳤다.
하지만 암반이 너무 단단한 지역이라 참호를 포기하고 야영을 하기로 한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물과 그늘이 부족한 지역에서 오직 그곳만에 만 물과 나무 그늘이 있었다.
챔스포드는 신중한 지휘관이었다.
이산들와나 지역은 고지대라 전망이 트이고 바위산이 있어 포위당할 위험이 큰 위험 지역이었다.
이를 잘 아는 챔스포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줄루왕국은 어떤 곳일까?
아프리카 부족의 무기는 단순했다.
나무로 만든 창과 방패가 전부였다.
하지만 줄루족에게는 단합이라는 또 하나의 무기가 있었다.
영국군을 비롯한 열강들이 말도 안되는 소규모의 병력으로 아프리카를 석권할 수 있었던 것도
아프리카 부족들의 분열 때문이었다.
이 당시 검은 대륙에는 제대로 된 국가가 없었다.
하지만 줄루족은 아프리카 중남부에서 유일하게 국가를 건설한 부족이었다.
국가라고는 해도 중국에 비교하면 기원전 4 천년경의 은 수준이었다.
그래도 행정체제가 있고 2 만 5 천명의 군인을 소집할 능력이 있었다.
독자적 전술을 가지고 전술에 맞춰 훈련된 군대는 아프리카 기준에서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줄루족은 이런 군대를 갖추게 되었을까?
그것은 1800 년대 초반에 줄루족의 청년 전사 샤카 줄루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샤카의 줄루족은 100 만명이 넘는 남아프리카의 인구 중에 불과 1,500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소수의 줄루족이 자신들보다 많은 병력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전투의 효율성을 높여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전술이다.
샤카는 문명인의 눈으로 봤을 때는 별거 없었지만 당시의 줄루족에게는 혁신에 가까운 무기의
개발과 집단 전술 등의 많은 개혁을 했다.
그리고 황소의 뿔이라고 불린 집단 전술의 혁신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상대로 효율적인 승리를 가능케했다.
다시 1879 년 이산들와나의 영국군으로 돌아가 보자
이때 줄루족은 샤카의 조카 캐츠와요가 다스리고 있었다.
영국군은 줄루족이 대군을 모을 수 있다는 것과 그들의 황소의 뿔 전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원시인은 원시인이었다.
캐츠와요의 줄루 군대는 근본적으로 언어가 다른 여러 부족들의 연합이었기 때문에 훈련의 질이나
전투력의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대군을 모을 수 있고 지리와 지형에 익숙하다는 점이 챔스포드는 불안했다.
챔스포드는 기병대를 보내 주변을 샅샅이 정찰하게 했다.
1월 21일 정찰 기병은 진지 전방 20킬로미터 지점에서 줄루족을 발견한다.
챔스포드는 병력의 절반과 기병 전부를 차출해서 출동한다.
출병 당시 챔스포드는 헨리 풀레인 중령에게 진지 지휘를 맡겼다.
당시 앤소니 던포드 대령이 지휘하는 300 명의 기병대가 지원 병력으로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헨리 풀레인은 야전 지휘 경험이 없는 행정 장교였다.
이것이 챔스포드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장교가 아무리 부족해도 실전 경험이 없는 지휘관에게 야전 지휘를 맡기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하급장교라도 경험 있는 지휘관을 임명하던가 던포드에게 지휘권을 주어야 했다.
그리고 챔스포드는 한 가지 더 실수를 했는데
풀레인보다 계급이 높은 던포드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명확한 지시를 해 놓지 않은 것이다.
영국군이 줄루 군의 전술에 대해 알고 있듯이 캐츠와요의 줄루군 역시 영국군의 전술을 알고 있었다.
정찰 나간 기병대가 발견한 줄루 군은 영국군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로 노출한 것이었다.
챔스포드가 출병하는 동안 줄루족의 주력 부대는 챔스포드를 지나쳐 이산들와나로 몰려들고 있었다.
챔스포드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던포드가 도착해 진지의 병력은 1,800 명이 되었다.
예상치 못한 적의 등장에 풀레인과 던포드는 불안해졌다.
이에 던포드는 기병대를 이끌고 위력 정찰에 나섰고 플레인은 줄루족을 찾기 위해 3개 중대로 구성된
분견대를 좌측면 고지로 보냈다.
이렇게 이산들와나 진지의 병력은 점점 분산되었다.
분산된 병력은 줄루족의 황소의 뿔 전술에 전멸하게 된다.
약 1,700 명의 영국군이 살해당했다.
패턴을 따르는 것이 전술이 아니다
줄루족의 이산들와나 승리 요인을 분석하자면 줄루 전사들의 용기와 헌신도 있지만
영국군의 전술적 실수가 겹치지 않았다면 그들의 승리는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영국군은 전술이 없고 패턴만 있었던 것이다.
영국군은 그들이 익숙하고 지금까지 효과적이었던 전술을 사용했다고 변명하겠지만
모든 전술은 목적, 지형, 상황에 맞추어 재창조해야 한다.
너무 흔한 교훈 같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진다.
승리한 전술은 답습해야 할 것이 아니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임용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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